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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예술

서양 미술가 소개 4편 (마네와 모네, 반 고흐, 피카소)

by O고라니O 202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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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가 소개 마지막 4편을 준비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알려진 화가들이 너무나 많지만, 마지막으로 마네와 모네, 반 고흐, 피카소 4명의 화가들에 대한 생애와 업적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각각 자신만의 예술적 비전을 보여주며, 미술계에 많은 기여를 했던 화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 탐험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마네와 모네
바닷가의 배

1. 마네와 모네의 생애

1-1 마네의 생애

마네는 1832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에 대한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중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에서는 마네에게 법률가나 해군이 되라고 했다가 실패한 후, 파리에서 역사화가인 토마 쿠튀르에게 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을 방문하며 미술을 공부하였습니다. 1870년 정치적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마네는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하기 어려웠던 시기였으나 마네는 작품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가들, 독립주의자들을 위한 전시회에서 현대미술의 중요한 작품을 전시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건강상의 문제로 파리에서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2. 마네의 작품들

에두아르 마네의 <작은배> 라는 작품은 클로드 모네가 아르장퇴유근방 센 강에서 작업할 때 사용하던 아틀리에용 보트를 그린 것 입니다. 배의 실내에는 모네의 부인 카미유 모네가 앉아있고, 그림의 대상이나 조형 방식은 이 회화가 유정에서 발로에서 제작된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네가 새롭게 시작했던 채색 기법에 감탄한 마네는 바로 그 기법으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붓 터치는 그림이 시각적 감흥을 따라 자유롭고 즉흥적으로 재현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마네는 그림을 그리는 기법에서 모네와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인상주의자 들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마네의 관심은 문학적인 주제나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규칙, 시민적인 예의점절에 바람직한 역사화 같은 그림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는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고야 등의 대작에 관한 수업을 받고 그러한 작품들을 연구하고 복사하였으며, 일본미술과 자연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며, 이 두 작품에서 놀라운 점은 마네의 고유한 표현방식입니다. 두 그림에서 주인공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두 여성의 시선은 관람자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치 비밀스러운 생각을 털어놓으려는 것 같은 얼굴입니다. 밝은 색감의 살갗과 다채로운 색깔의 과일, 꽃 등으로 이루어진 배경이 미화된 에로티시즘 주제와 모순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정면으로 비춰진 빛의 표현은 평면적인 효과를 내주며 마치 마네는 보기 싫은 것에 끌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1-3. 마네와 모네의 차이점

사람들은 모네와 모네의 작품을 헷갈릴때가 많습니다. 이름도 비슷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며 활동장소도 같아서 그런 듯 생각됩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에 속하지 않는 묘한 경계선을 지켰고, 당시의 관습을 거스르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유명했고 현실주의적인 접근을 강조했습니다. 반면 모네는 인상주의 미술의 중심인물입니다. 자연의 빛과 색상에 대한 관찰을 중시했고, 색채사용과 빛의 효과를 강조하는 기법을 사용한 인물입니다.

그림의 주제에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네는 주로 상류층 인물, 도시생활, 종종 현실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요소를 담아내는 반면, 모네는 자연 풍경과 일상적인 장면에 초점을 두었고, 물, 꽃 정원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기법에서 확연히 보이는 차이점은 마네는 뚜렷한 선과 형태를 보여주는 기법이지만, 모네는 흐릿한 터치, 물감을 층층이 덧칠한 형태의 그림을 그렸으며, 인상주의 화가답게 순간의 장면의 빛과 색상을 표현하는데 집중했다는 점이 두 사람의 차이점 입니다.

2. 모네

2-1. 모네의 생애

모네는 인상주의 화가 중 한 명으로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파리로 이주하여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알제리에서 1862년 병역을 마쳤으며, 파리에서 카미유 피사로,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등의 화가와 교류하였습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개최되던 1874년 아르장퇴유에 체류하였습니다. 이 전시회에 많은 작품을 전시했으며, 가장 유명한 <해돋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후 지베르니에 정착하여 연작을 제작합니다. <루앙 대성당>을 제작했으며, 건물의 입체성과 색채에 대한 빛과 대기에 영향을 실험하였습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연작으로 담아냈습니다. 이후 1920년 <수련>이라는 연작을 그려냈으며 점차 비구상 회화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네는 점차 시력이 나빠져 작품활동을 못하던 시기가 있었고, 이후 해가 있는 낮 시간을 택해 주로 작업했으며, 그마저도 기억과 관찰이 더해진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이후 83세의 나이로 프랑스 지베르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2-2. 모네의 작품

<정원의 여인들>은 유화 작품으로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야외에서 제작된 이 그림의 주제는 떨어지는 빛의 방향에 따라 밝게 빛나거나 그림자가 진 부분을 무작위로 배치해 그린 그림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군상을 이룬 인물에 대한 인상이 묘사되고 있는데, 네 명의 여인 중 한 면은 마치 그림 안쪽으로 빠르게 숨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모네는 빛의 효과를 재현한 이 매력적인 작품 이후, 형태와 색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조건들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건초더미, 루앙의 대성당, 특히 지베르니의 연못의 수련 등은 그러한 연구 과정에서 탄생한 연작들의 주제입니다.

 

3. 반 고흐 

반 고흐
반 고흐 - 사이프러스 나무들

3-1. 반 고흐의 생애

자화상으로도 유명한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헤이그, 런던, 파리에 있는 미술 상회 '구필과 시에'의 직원이 되었고, 원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다가 과장된 자기희생으로 인해 선교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으며, 여러 언어를 배우려 여러 직업을 경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880년 파리에서 자유미술가로서 생활했습니다. 다양한 인상주의 화가들과의 만남을 가지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신적인 고통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매독과 신경질환에 의한 정신착란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젊은 나이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3-2 반 고흐의 작품

고흐는 네덜란드에서의 시기와 프랑스에서의 시기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화가로서 농가 회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고흐의 모든 회화와 드로잉 작품은 노동이라는 주제로 일반적인 자연 연구를 실행했던 초기 작품과 인물화, 자화상, 정물화, 실내 풍경, 꽃 그림, 풍경화, 렘브란트나 밀레의 작품을 재구성해 본 이후의 작품으로 나뉩니다. 1889년에 그린 자화상은 거울을 향해 집중된 시선은 마치 화가각 다시 간질병으로 발작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나는 이 병원에서 정신이상자들의 현실 그리고 미친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처럼 그림에 나타난 자화상은 차갑고 이글거리는 바탕색을 배경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그의 자의식을 표출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 그의 심리학 상태가 미술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하늘과 땅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주된 기법은 과장된 선의 사용인데, 이 방식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자화상>에서도 보입니다. 고흐가 다룬 주제는 공통적으로 독립적인 색채와 형태를 통해 조형적이며 감각적인 내용을 담는 목적을 수행했으며, 때문에 주관적으로 파악된 대상은 점차 깊은 영혼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드로잉적인 구조나 색채는 표현주의 회화의 조건이며, 이와 같은 회화는 반 고흐가 홀로 외로이 발전시켜 나간 기법입니다.

 

4. 피카소

4-1. 피카소의 생애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1881년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미술 교육자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미술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의 조언을 토대로 자신만의 예술적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미 피카소는 어린시절부터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1900년부터 프랑스 파리에 방문해 정착했으며, 청색 시대와 장밋빛 시대, 분석적이며 종합적인 입체주의 이후 1914년부터 '피카소의 신고전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초현실주의 그룹과 친분을 맺기 시작했으며,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에 <게르니카>를 전시하게 됩니다.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하며, 피카소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그의 작품 속 여성 모델들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입체주의 특징 작업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며, 조형미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오히려 본인은 반대방향의 길로 들어서게 되며, 다양하게 변화한 피카소 양식 요소 중 하나일 뿐 자신의 양식을 뛰어넘는 작품은 결코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피카소는 미술가로서 평생 80년간 1만 점의 회화를 제작했고, 주요 작품들은 본질적으로는 사물을 바라보는 인습적인 관점과 이해에 맞서 싸운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4-2. 피카소의 작품들

파카소는 프랑스 파리를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뭉크의 어둡고 암울한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방문하며 유사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입체주의적 단계로 가기 전 기하학적이며 세련된 형태로 이루어진 탈원근법적인 구성을 80점이나 제작했고, 그중 하나인 <아비뇽 연인들> 이였습니다. 이 작품은 아프리카 조각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하였으며, 그림의 대상을 입체주의적으로 분해하기 전 단계의 작품입니다. 이후 <황소 해골이 있는 정물>이라는 작품에서는 창문의 심자 틀로 인해 죄우상하 대칭이 이루어진 배경과 4분의 3 측면으로 그려진 황소 해골의 공간적인 효과를 대조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황소 해골은 어두운 창문 앞에서 창백한 색채로 표현하였고, 외부와 내부를 보여주는 창문은 어두운 밖을 보여주며 내부 공간은 은둔의 자오로서 바깥세상과 차단되는 모습입니다. 대조되는 색채로 화소의 해골은 주근 사람의 해골과 비슷하게 느껴지며 허무의 상징물로 등장했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친구이자 스페인 조각가인 훌리오 곤잘레스가 사망한 후 그렸습니다. 그에게 석재 조각을 배우기도 했었으며, 그에 따라 창문의 십자와 해골은 이 정물화가 레퀴엠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그림은 파리가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상황을 빗대에 보여주기도 합니다.

<게르니카>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스페인 공화국의 전시관에 걸린 이 작품은 정치적 의미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그림에서 사람의 모습을 황소로 빗대어 표현한 작품들이 몇몇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이 작품은 색채가 없는 흑백 사진 같은 느낌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비극적인 장면을 명암 대조로 강조하여 공포와 혼란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스페인 내전 중에 그려진 작품으로 게르니카는 그림을 통해 비극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평화와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메시지를 예술의 힘을 통해 나타내는 작품 중 하나로 현대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들
피카소 -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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