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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예술

동양 미술 - 한국의 금속공예

by O고라니O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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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예를 금속 공예와 목칠 및 민속 공예 두 분류로 나누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신라시대 금속공예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초기 신라시대 옆 나라인 일본의 일본서기라는 책 속에 일본 사람들은 신라의 찬란한 금, 은, 보석 공예품들을 얼마나 우러러보았는지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금산이 풍부했던 나라이며,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은 현대인 못지않게 귀금속 공예품이 세련되었습니다. 우리 조선의 문헌에는 이러한 기록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에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되며, 금과 은이 많이 나고 휘황찬란한 장식품들이 만들어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신라의 자랑이라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동아 고고학상에서 신라의 적석고분 출토의 귀금속 공예가 찬양받고 있는 이유는 신라만의 고유한 양식이 분명히 표현되어있고, 그 기법과 표현에 차원 높은 세련된 아름다움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1. 신라의 황금보관

한가지 예시로 황금보관을 들게 됩니다. 황금보관은 사슴을 상징한 사슴뿔 모양과, 깊고 넓은 삼림의 고마움을 상징한 나무모양의 장식을 기본 의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북아시아민족의 본바탕인 고유한 민속신앙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무는 대생수지형으로, 사슴은 훤칠한 호생녹각형으로 단순화시켜 세련된 모습으로 장착시켰으며, 여기에 곁들인 내관에는 고구려 이후 민족 양식의 하나로 끌어온 조익형 또는 새깃 모양을 도식화한 관식을 창안해 조형미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신라의 황금보관이 한국 고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이유에는 중국 고대문물 종 닮은 양식이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한, 일본의 고분에서 신라의 황금보관을 본떠 만든 금동관 유물이 출토되었고, 이 것은 신라의 양식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갖가지 찬란한 금귀고리의 양식이 독자적이고 세련된 신라의 공예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각양각색의 휘황찬란한 귀고리를 보면 신라의 금귀고리는 예술과 기능 면에서 넘볼 수 없는 공예라 생각됩니다. 다음 본문에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2. 신라의 금귀고리

고대의 금귀고리 하면 고고학자들은 신라시대의 금귀고리를 첫번째로 떠올릴 만큼 신라의 금속공예 미술을 알리는 존재로 세계의 고고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의 금귀고리는 두 종류로 나뉘어 발달했습니다. 굵은 고리로 된 것을 태환식, 가는 고리로 된 것을 세환식이라고 불렸습니다. 태환식 귀고리는 속이 빈 굵은 고리에 통쇠로 된 가는 고리를 잇달아 달고, 이 통쇠고리에 여러 모양의 장식을 달아 만든 것이다. 이러한 모양은 태환식 귀고리 중에서 걸작이라 불릴 만큼 대표적인 작품이며, 상하 2단으로 만들어진 주반둘레에 작은 심엽형 장식을 무수히 꼬아 달았으며, 맨 밑에 하트모양 또는 나뭇잎 형태의 큰 장식을 달아 전체적인 비율을 맞춰주었습니다. 굵은 고리에는 육각형의 구간을 연속해 만들어 금싸라기로 장식했고, 가는 고리에는 초엽무늬를 장식했습니다. 금싸라기나 금실로 공예품을 장식하는 기법은 그리스의 고대 금제 공예품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기법이 중국을 통해 동해바다로 넘어 신라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귀고리 들은 신라시대 무덤에서 찾아볼 수 있었으며, 귀 양옆에 놓여있었으며, 때로는 한 사람이 두 쌍의 귀고리를 걸로 있었으며, 남자의 시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신라시대의 금귀고리의 발달은 그 당시 중국에서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양식을 지녔으며, 동해바다를 건너 일본의 고대인들을 자극해 신라 귀고리의 아류라고 볼 수 있는 형태의 귀고리들이 일본 고분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신라 태환식 금귀고리
굵은고리 귀걸이 -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3. 성덕대왕 신종

성덕대왕 신종은 불교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인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며, 국보중의 국보라 불리는 작품입니다. 이 종은 크기가 구경이 7척 5촌 즉, 높이 3.75m, 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 18.9톤입니다. 당대 가장 큰 종은 황룡사의 황룡사 대종으로 성덕대왕 신종의 4배 컸지만, 안타깝게 황룡사가 파괴될 때 소실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국보로 지정될 만큼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구는 부드러운 팔릉형을 이루며 구대, 견대, 유곽의 주련을 풍려한 보상화문으로 장식하고 사면의 유곽 안에는 각각 아홉 개씩의 연화문 종유를 넣고 유곽 아래 종체에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비천상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당대의 당나라나 일본의 밀축, 평안시대의 종들은 끈 모양의 선으로 종체를 묶은 것과 같은 공통된 양식을 보이지만, 이 종은 그러한 양식을 벗어나 창의적으로 한국적인 양식을 완성해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계승되어 한국 종이라는 전통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남겨졌으며, 에밀레 종 이라고도 불립니다.

4.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사리장치

사리장치는 석가모니의 분신을 모시기 위한 불도들의 정성이 응결된 거룩한 조형이 바로 사리장치 입니다.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식 석탑이며 탑 기단부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함과 사리병은 함께 발견된 순금제 금강경 책과 함께 세상을 놀라게 해준 우리 민족의 1급 문화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방좌 위에 복련의 받침을 두어 바닥이 둥근 사리병을 안치했으며, 고운 초록색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순금으로 만든 연꽃 봉오리 모양의 마개가 덮여있습니다. 초록색 유리 사리병은 크기가 병 높이 7.7cm로 작지만 고려청자의 맵시와 아름다움을 갖은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사리병좌는 순금방합 안에 모시어졌으며, 이 방합은 찬란한 금색을 뿜고 있습니다. 방합의 사면과 네모 지붕 모양의 뚜껑표면에는 빈틈이 없이 만들어졌으며, 크고 작은 원권문을 찍어 장식했으며, 사면의 중심부에는 불교적 화염문이 혼성된 대칭적인 화문이 찍혀 있어 이 무늬가 주는 고귀함과 격이 엄청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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